나의 생각

38년 아버님에게 물었습니다. 6.25 전쟁은?

71년생 권진검 2012. 10. 22.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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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비즈니스가 대박이 나서, 서울서 살다시피 하기에 거의 포스팅을 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한번 살아가려고 합니다. 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요~

사람이 큰 뜻을 품었는데, 조상 때문에 낙마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가 나중에 원대한 꿈을 꾸고 이를 실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검증을 받게 된다면 아마도 가족의 내력이 심판대에 오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쓰게 시작될 진검일지는 더러운 가면을 벗고 정정당당하게 살자..라는 가훈속에 살고 있는 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서, 감히 자서전이라고, 진검승부의 생각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종이책으로 출간될 것이라고 거드름을 피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40대 아빠와 엄마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각자의 경험과 비젼을 공유하는 그런 차원에서, 가까운 이웃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격동의 세월을 딛고 소중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고 있는, 그래도 꿈을 버리지 않는 두 아이의 아빠가 솔직하게 써내려가는 일기라고 촌평하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마련해 줄 것인가, 깊이 고민하는 요즘이 아닐 수 없고, 대선 정국에서 경제민주화, 복지 만을 노래하면서 정의라는 단어는 실종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또 다시 불거진 남북갈등에 분노하며, 그 첫 페이지를 71년생 막내아들이 38년생 막내아들이신 아버님에게 당신이 기억하는 6.25전쟁에 대해서 소상하게 말씀해 주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들은 실전 참상에 대한 내용을 오늘은 주제로 삼고자 합니다.

 

왜 큰큰 아버님은 북한 공산당에게 처형되지 않았나요?

 

 

충청남도 강경.

20대 젊은 나이에 순교한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생각나기도 하고, 순교자들의 성지, 얼마전 찾았던 성지순례의 장소 여산의 이웃동네이기도 합니다.

저희 가문의 선산이 있는 곳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북한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기도 한 지역 중의 하나이지요.

당시 아버님은 13살, 큰큰 아버님은 23살.

큰큰 아버님은 검찰청 말단 직원이었습니다.

강경을 접수한 북한 공산당은 강경지역의 감옥 죄수, 양아치, 깡패들을 동원해서 소위 치안대라는 것을 결성합니다.

고도의 전쟁 수행 이론을 토대로 공산당은 자기들의 손으로 피를 묻히지 않고, 지역 불만세력의 손으로 살육을 시작합니다.

남한 사람의 손으로 남한 사람을 죽이는 작업이었죠.

"저 자는 괴뢰 남한 정부의 충복이었다...죽여라!!!!"

그러면.....옳소~~죽이자..하고 인간 본연의 악마근성이 발현되는 그런 무지렁이들도 공조하게 되는 소위, 인민재판.

갑자기 매춘을 한 여성과 그리스도와 구경꾼들의 성서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처형 순위 1위, 군인, 경찰, 검찰.

일단 죽여놓고 시작하는 것이죠.

검찰 소속이셨던 큰큰 아버님에게도 인민재판의 칼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죽여라!!! 남한 빨갱이다!!!"

80여년 평생 담배를 피우시지 않으셨던 큰큰 아버님은 항상 담배를 소지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이전, 큰큰 아버님은 검찰에 잡혀온 강경지역 죄수들에게 말없이 담배 한개피씩 건네는 그런 가슴이 따뜻한 말단 공무원이었던 것이죠.

그 담배를 물어 피워 본, 당시 무소불위의 친북 치안대는 망설이기 시작합니다.

강경 사람들 모두 죽이고, 제일 나중에 죽여야 되는 사람이 큰큰 아버님이라고 강경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잔혹했던 치안대는 큰큰 아버님을 총살시키지 못하고, 북한 공산당에게 일임하여 큰큰 아버님은 힘없이 계속 북한 공산당을 위해서 검찰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강경지역에서 살아남은 한국 국군, 경찰, 검찰 중 유일하다고 평이 있었죠.

이 대목을 들려주시는 38년생 아버님의 눈에서..... 제가 태어나서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국군의 반격....손가락 한번 꼬옥 누르고....계속 보시도록 합니다.

 

인천 상륙작전, 그리고 북진.....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낙동강에서 배수진으로 버텼던 국군은 북진을 하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충청남도 강경은 국군의 손에 넘어왔습니다.

소위 부역을 했던, 공산당의 업무를 보았던 큰큰 아버님의 목숨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죠.

그러나, 후퇴하는 공산당은 큰큰 아버님을 처형하지 않고, 북으로 데리고 올라가게 됩니다.

아.....남과 북에게 모두 인정받은 젊은 검찰청 직원.....

인간성,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았더라면, 치안대에게 한번, 후퇴하는 공산당에게 두번이나 처형이 되었을 큰큰 아버님.

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북송이 되던 큰큰 아버님은 충청남도 대둔산 자락에서 기지를 발휘합니다.

"똥이 마렵구만유"

몸속 신진대사는 국군이나 공산당, 소련사람들이나 미국사람들에게나 가장 중요한 생리작용인 바, 어색하지 않게 큰큰 아버님은 그길로 사생결단의 탈출을 감행하셨습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오직 고향 강경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 하나,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간다는 마음 하나로 큰큰 아버님은 일주일이 넘도록 산속을 헤매기 시작합니다.

돌아가도 죽을지도 모릅니다.

북한 공산당에게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될 가능성이 많았죠.

그러나, 큰큰 아버님에게는 그런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두고 온 세명의 동생들.....오로지 가족 생각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풀을 뜯어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달리고 짐승처럼 산속을 헤메다가 1주일 후, 강경 옆, 고산이라는 곳으로 잠시 피난을 가셨던 작은 이모할머님의 집에 큰큰 아버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옷은 다 헤지고, 수염에, 헝클어진 머리....사람 꼴이 아니었던 모습으로 가족에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한집안의 장남이자 강경의 아들은 다시 대한의 품으로 귀환했습니다.

 

또 다시 국군에 의해서 처형되지 않았나요?

 

 

아버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무리 현직 검찰청 직원이었더라도, 북한 공산당에게 인정을 받아 일을 했으면 사형감이라는 것이죠.

혹독한 심문과, 강경 사람들의 절규 속에 큰큰 아버님은 세번째 처형의 기회에서 또 다시 살아남으셨습니다.

38년생 아버님은 10살 위의 큰큰 형님이신 큰큰 아버님을 거의 아버지처럼 여기면서 산 이유에 이런 히스토리가 있었던 것이죠.

충청남도 강경.

제 할아버지는 당시 6000평의 농지를 소유하고 약 일년에 35가마 정도의 쌀을 수확하는 그런 평범한 농사꾼, 대대손손 농부의 아들이셨다고 합니다.

큰큰 아버님은 그런 할아버지의 장남이셨지요.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강경이었지만, 저희 할아버지와 큰큰 아버님, 둘째 아버님, 셋째 아버님, 그리고 막내이신 제 아버님은 피난을 가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죄 지은 것이 없기 때문였다고 합니다.

 

 

그냥, 이념이라는 것도 모르는, 아니, 피난을 가봐야 뭐하겠느냐는 자조도 있었다고 합니다.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셨던 것이죠.

아버지 4형제분과 할아버지와 할머니.

강경에서 가족 중에 한사람도 희생되지 않은 운이 좋은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잔혹했던 남북전쟁, 그 속의 무차별한 희생을 낳았던 남남갈등......

그렇다고 목숨만 부지하는 그런 비겁한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법원 말단에서 서기관으로 은퇴하셨던, 6.25 당시 중학생 신분으로 학도병에 참전하셨던 33년생 셋째 아버님, 그리고 경찰 순경으로 시작하셔서 경사로 은퇴하셨던, 당시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30년생 둘째 큰 아버님의 스토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5.16 쿠데타로 인해 한국은행에서 실직하셨던 제 아버님의 용감하신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문의 선대 이야기를 간단하게 그려보고자 합니다.

2010년 대구 가톨릭 병원에서 돌아가시면서 모든 장기를 세상에 남겨두고 가신 큰큰 아버님께....너무 죄스러운 막둥이조카로 느껴지는 그런 요즘입니다.

생전에 6살, 4살 두 아이를 큰큰 아버님께 보여드리지 못한 죄는 정의로운 아빠로 살아가는 다짐으로 갈음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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