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5.16 쿠데타로 실직하신 아버지의 선택

71년생 권진검 2012. 10. 2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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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진검일지, 그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지난 포스팅에는 충남 강경에서 6.25 전쟁 때 살아남으신 검찰 말단직원이셨던 큰큰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서 적어내려간 바 있습니다.

2012/10/22 - [남녀&부부이야기] - 38년 아버님에게 물었습니다. 6.25 전쟁은?

그 당시 둘째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시면서 밀집모자의 재료, 미르나무를 대패로 갈아 만든 쪽편을 공장에 납품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둘째 아버지께서는 지리산 빨치산 소탕에 참여하셨고 그 공을 인정받아 순경 특채로 긴 경찰공무원 생활을 이어가시게 됩니다.

한편, 당시 학제편제로 중학생이셨던 33년생 셋째 아버지께서는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셨고, 이후 법원 말단 공무원으로 공직에 몸을 담으시고 서기관으로 정년을 퇴직하시고, 아직도 법무사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큰 아버지들의 막내동생이자, 막내아들 저의 아버지께서는 6.25 발발 당시 13살...

그렇게 시간은 흘러, 1950년대 후반.

 

고교 졸업 후 충청남도 강경에 경사났네!!!

 

 

지금은 초라한 시골의 한 학교이겠지만(?), 당시 충청남도 강경에 자리잡은 강경상고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오신 부산상고 못지 않게 명문고등학교였습니다.

아버지의 한국은행 동기이신 동창분들의 모임이 '57회' 라고 들었는데, 저는 당시 19살의 나이로 57명이 한국은행에 입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57회 졸업생 5명의 동기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대학교 때에 알게 되었습니다.

전교 5등까지는 한국은행에 입사, 나머지들은 서울대 법대를 진학을 했을 것입니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집에서는 돼지를, 한국은행에 입사한 집안에서는 소 한마리를 잡을....그 당시의 상황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후, 시대가 급속히 변화해서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저...밑에 있던 서울대 출신들에게 밀려 좌천과 이직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여간, 당시 시골 고등학교에서 한국은행에 입사한 아버지는 3명의 형님들과 똑같이 국가가 주는 녹을 받고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나.....기쁨도 잠시....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습니다.....

재미난 스토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손가락 한번 꾸~~욱 누르시고 보시도록 합니다^^

파면.....그리고 3인방의 고뇌

 

 

사연인 즉, 한국은행 대전지점에는 강경에 사는 오랬동안 아는 누나가 먼저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애...요새 누가 군대를 가?.....내가 빼줄께"

지금도 잘나가는 사람들의 자녀들은 결코 군대를 가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군대에서 맞아 죽기도 일쑤, 그 누나는 동네 동생을 위해서 간단한 작업(?)으로 아버지에게 '병종' 이라는 신체검사 딱지를 선물하고야 맙니다.

며칠 전, 아버지께.....그 카드를 왜 받으셨냐교 되물었습니다.

아버지..멋적은 표정으로...."당시는 다...그렇게 했다....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데...그냥 일임하고 열심히 일하다가 딱지를 받고야 말았어....내 평생 단 한번의 실수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런 '병종' 딱지를 받은 공직자들을 모두 현직에서 파면하고 맙니다.

군사정권이기에 병역기피자들에게 혹독한 총칼을 겨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조치로 받아들여집니다.

 

재신검을 받으라....

 

 

군사정권은 재신검을 통해 그 옥석을 가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병역담당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네 형과 누나들이요, 다시 '병종' 딱지를 받고 한국은행에 재입행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부는 이렇게 또 다시 딱지를 구입해서 다시 재입행을 하였지만, 3인방...아버지를 포함한 동기 3명은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상의 끝에....입대한다....

3명은 과감히 입대를 하고, 아버지께서는 34년 14일이라는 전무후무한 육군의 복무기록을 가지고 계십니다.

군대입대 후....군사정권도 사람인지라...너무 하지 않았나...하는 자기반성으로 재입행은 줄줄이 이어졌고, 아버지께서는 군대에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군대 제대 후, 아버지께서는 일정 심사를 통해서 한국은행에 재입행되고, 이후 서울본점으로 발령을 받게 됩니다.

이후, 아버지는 대전여자인 어머니를 만나서 월세 8만원의 이대 입구 근처 쪽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셨고, 저는 6번째(?) 자식으로 서대문구 모래내시장 한복판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가장 보수적이라는 TK 지역 안동 권씨이신 아버지는 저를 한번 안아준 기억이 없습니다.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의사가 되라..변호사가 되라...그런 주문도 없으셨죠.

나중에....알게 된 사실은 아들 중 1명이 상경대를 가서 한국은행 총재를 한번 하는 것을 바라셨다고 합니다.

딱 하나, 늘 말씀하신 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대학때..친구에게 얻어먹은 룸싸롱 술값이 있다면...너도 한번 쏘고 싶다면...내가 빚을 내서라도 조금 주겠다...그러나, 솔직히 말하라.....영어학원 다닌다고 거짓말하지 말거라....^^아버지도 진검승부~~

무뚝뚝한 아버지이기에...반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요즘, 두 아들의 꼬치를 만지작 거리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뽀뽀..허그..주말이면...공원, 여행....우리 아빠는 왕이십니다.....첫째 6살의 입에는 늘 아빠, 아빠입니다^^

말년 경제적으로 실패를 하신 아버지...저는 잘못된, 허왕된 재테크는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1995년, 아버지와의 독대.

"저...어학연수를 한번 꼭 가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그래?....음....네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내가 힘써 볼께"

아버지의 고민은 깊었지만, 결국 저는 어학연수를 떠나지 못하고, 토익점수만 수퍼 울트라하게 만드는 스펙쟁이였습니다.

 

2005년, 태어나서 비행기 처음 타보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5년, 저는 머리털나고 처음으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고, 2달 후 아내를 처음 만나기 위해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제주도행 비행기는 평생 아프고 힘든 사람들은 돌보겠다는 다짐을, 캐나다행 비행기는 지금의 아내와 두 아이들을 제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우리집 가훈.

"더러운 가면을 벗고 진검을 들고 승부하라"

외부 손님용 멘트.

"다같이 잘살자"

장기간 은행 검사역을 역임했던 아버지는 명절에 들어오는 선물용 갈비를 어머니께 엄명을 내려 대문밖에서 썩도록 방치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갈비가 썩기 전에 몰래 가져다가 갈비탕을 끓이시면.....그냥 말없이 드시고 했지요.

이제 팔순을 향해 나이를 잡수시는 아버지의 큰 기쁨은 제가 서울로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절이 다가오면......."오고 가고 기름값도 아깝고....힘들고....절대로 오지 마라...."

 

말과 행동이 다르신(?) 아버지의 흐뭇함

 

 

기어코 올라갑니다.

제 형님은 외동딸이 하나 있죠.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동네 아저씨들과 산에 오르시는 아버님은 이상하리만큼 6살, 4살 두 아들이 서울집에 있으면 등산을 안 가십니다.

옥상텃밭을 손질하면서 가끔...아이들이 뭘 하고 있나...요렇게~~곁눈질하고 보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 정의롭게 사는 것, 서울 자주 올라가는 것...그것 밖에 없을 듯 합니다~

다음 편부터는 비로소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이 포스팅을 읽고 할아버지와 아빠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도 거짓없이 포스팅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이라도, 한끝 자락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나는 안동 권씨 35대손에서 제명됨을 약속드립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럴 바에는 다시 비행기 잡아타고 캐나다로 역역이민을 가서 골프나 치면서 사는 것이 낫죠~~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남기는 그런 아빠가 되기를 오늘도 거듭 다짐합니다.

아...친할아버지는 34개월 14일을 복무했는데....손자들인 제 아이들은 캐나다와 한국, 이중국적자.

나중에 그들처럼...병역을 기피하기 위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만 할까요?^^

선택의 기로에 선 아이들이 19세가 되면, 이글을 꼭 읽어보고 스스로 결정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진검승부의 매력이기도 하지요.

손가락 팍팍 눌러주시고, 멋진 한주 보내세요.

저는 오늘 10시, 주말 캐나다와 미국 순방(?) 여부가 결정됩니다^^

아..꼭..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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